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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그림, 선 하나를 긋는 것부터 시작해요 — 조절의 경험

by soriedus 2026. 6. 13.

먹그림, 선 하나를 긋는 것부터 시작해요 — 조절의 경험
먹그림, 선 하나를 긋는 것부터 시작해요 — 조절의 경험

 

먹물 앞에서

5월 말, 교실에 먹물과 붓이 놓였다.

아이들이 하나둘 자리에 앉으면서 먹물을 들여다봤다. 검고 진한 색. 냄새도 낯설었다. "이게 뭐예요?" "붓으로 그리는 거야, 먹그림이라고 해." 아이들이 붓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먹그림은 수정이 안 된다. 한번 그으면 지울 수 없다. 아이들에게 그건 처음 경험하는 조건이었다. 연필은 지우개로 지울 수 있고, 크레파스는 덧칠할 수 있다. 그런데 먹물은 한번 그은 선이 그대로 남는다.

그 조건이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쳤다.

선을 긋기 전에 멈추는 아이들

처음에 아이들이 천천해졌다.

평소 미술 활동에서 빠르게 칠하던 아이들이 붓을 든 채로 잠시 멈췄다. 어디에 선을 그을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멈춤이 새로웠다.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던 신중함이 먹그림 앞에서 나왔다.

한 아이가 조심스럽게 선 하나를 그었다. 길고 가는 선이었다. 들여다보더니 다음 선을 그었다. 조금 더 굵게, 조금 더 길게. 선이 하나씩 쌓이면서 그림이 됐다.

다른 아이는 붓에 먹물을 너무 많이 묻혔다. 선을 그었더니 종이에 번졌다. 아이가 잠시 멈추더니 붓을 들고 그릇 가장자리에 살짝 닦았다. 누가 알려준 것이 아니었다. 번진 것을 보고 스스로 먹물의 양을 조절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절이란 무엇인가

먹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힘의 조절이다.

붓을 세게 누르면 선이 굵어지고, 가볍게 누르면 가늘어진다. 빠르게 움직이면 선이 날카롭고, 천천히 움직이면 부드럽다. 먹물을 많이 묻히면 번지고, 적게 묻히면 선이 끊긴다.

이 모든 것을 손이 직접 경험해야 한다. 말로 설명해서는 전달되지 않는 감각이다. "살살 해봐"라는 말보다, 세게 눌렀을 때 선이 뭉개지는 것을 보는 것이 훨씬 빠르게 배운다.

만 3세 아이들에게 조절은 아직 어렵다. 힘 조절, 속도 조절, 양 조절. 이 모든 것이 아직 발달 중이다. 먹그림은 그 조절을 연습하는 활동이다. 정교하게 잘 그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손이 조절을 경험하는 것이 목적이다.

지울 수 없다는 것

먹그림이 다른 미술 활동과 다른 점이 하나 더 있다.

결과를 받아들이는 연습이 된다는 것이다.

선이 마음에 안 들어도 지울 수 없다. 그 선 위에 다음 선을 그어야 한다. 번진 먹물도 그림의 일부가 된다. 처음에는 이것이 불편한 아이들이 있었다. "잘못 그렸어요"라고 하면서 새 종이를 원하는 아이도 있었다.

나는 새 종이를 주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하면 이 선이 그림의 일부가 될 수 있을까?" 아이가 한참 들여다보다가 다음 선을 그었다. 번진 곳을 중심으로 다른 선들이 더해졌다. 완성된 그림이 처음 의도와 달랐지만, 그 나름의 모양을 가졌다.

예상치 못한 결과를 받아들이고,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 이것도 살아가면서 필요한 능력이다.

앞으로 자유롭게

이날 기록을 학급일지에 남기면서 생각했다. 앞으로 자유놀이 시간에 먹그림 재료를 놓아두면 좋겠다고.

정해진 시간에 모두가 함께 하는 활동이 아니라, 하고 싶은 아이가 자유롭게 선을 그어볼 수 있는 환경. 그 안에서 각자의 속도로 선을 긋고, 조절하고, 받아들이는 경험이 쌓여가면 좋겠다고.

먹그림은 선 하나로 시작된다. 그 선 하나가 아이에게는 꽤 큰 용기의 결과다.